내생각

두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칼국수

나찬양 2023. 1. 24. 11:38

시어머니는 시장에서 칼국수 장사를 하신다. 날이 덥든, 춥든,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매일같이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장사 준비를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가게로 향하신다. 그리고 매일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오신다.

이렇게 일하시기를 벌써 15년째다.

고단한 세월이 말해주듯 어머님의 머리는 하얗게 샜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팼다.

하지만 입가엔 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따뜻한 미소엔 인자함과 강인함이 묻어난다. 힘드실 법도 한데

어머님은 우리 앞에서 한 번도 앓는 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결혼을 하고 어머님을 도와드리러 종종 시장에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어머님은 며느리가 와서 일을 거들어 주는 게 내심 고마운 눈치셨다.

그런데 시장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시장에 있는 노점이라 일반 식당과 같은 환경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다.

나는 고작 하루 일했을 뿐인데 발은 퉁퉁 부었고, 몸살로 며칠을 앓아누웠다. 

 

어머님은 어떻게 이 일을 15년씩이나 할 수 있으셨던 걸까. 

멸치 국물이 펄펄 끓는 뜨거운 화구 앞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시는 어머님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한날은 어머님께 여쭤봤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나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냐고. 힘들지만 나에겐 키워야 할 두 아들이 있었고, 일으켜 세워야 할 집안이 있었다고. 

칼국수 만드는 일로나마 두 아들을 자립시키고 건실히 키워낼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고.

 

그랬다. 남편이 군대에 가있던 어느 날, 아버님의 사업 실패로 온 집안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설상가상, 아버님이 지방으로 출장 갔다 돌아오던 날, 타고 있던 고속버스는 큰  사고가 있었다.

그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있었고, 뉴스와 신문은 사망자 명단에 아버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다행히 아버님은 큰 고비를 넘기시고 극적으로 살아나셨다.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만 여전히 다리가 불편하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님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어머님이 오롯이 집안의 가장이 되는 수밖에.

 그렇게 어머님은 칼국수 장사를 시작하게 되셨다. 빚을 갚기 위해, 쓰러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그리고 이제 막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시장에서 자리 잡고 일할 수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하셨다. 처음 노점을 시작했을 때,

시장 상인들의 텃세에 골목 뒤편에서 눈물을 훔치는 날도 많으셨단다.

자기들 장사 터에 새로운 상인이 들어온 게 아니꼬웠는지 대놓고 욕을 하는 건 물론이고,

가게 앞에 몰래 쓰레기를 몇십 개씩 버리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하셨다. 

아침마다 주인모를 쓰레기를 버리며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고 한다. 

어머님 가게 주위의 상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뒤에서 험담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도 여러 번. 그런 수모와 모욕을 겪으며 무려 15년을 버티셨다.

그저 가족들을 생각하며 긴 세월을 견뎌내셨다.

 

그렇게 번듯이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셨다. 아들 결혼도 시키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게끔 자립도 시키셨다.

언제 갚을까 방법이 묘연했던 그 많던 빚도 다 갚으셨다. 어머님의 칼국수가, 아니, 어머님의 피와 땀방울이 아들을 키워냈다. 

그런 어머님이 참 존경스럽다.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이제는 어머님이 어깨에 짊어진 그 무거운 짐을 조금은 내려놓으셨으면 좋겠다. 

본인이 모든 걸 감당하고 책임지려했던 그 무거운 짐을. 오랫동안 밀가루를 치대고 멸치육수를 우려내던 그 긴 세월을 

어찌 내가 가늠할 수 있을까마는, 그저 며느리로서 어머님 그동안 참 고생 많으셨노라 말씀드리고 싶다. 

살갑고 따뜻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며느리지만 사실 마음속 깊이 어머님을 존경한다고. 

칼국수 만드느라 퉁퉁 부은 그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아드리고 싶다.

https://brunch.co.kr/@better9